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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서포터즈3기_김도와]1945년 항복한 일본 대표는 왜 절뚝이는 걸까 (4.29 상하이 의거의 결과와 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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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387회 작성일 24-04-04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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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서포터즈 김도와님의 게시글 
<1945년 항복한 일본 대표는 왜 절뚝이는 걸까
(4.29 상하이 의거의 결과와 함의)>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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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항복한 일본 대표는 왜 절뚝이는 걸까?

-4.29 상하이 의거의 결과와 함의-

김도와

 

-      1945 9 2일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 장면 -


 

https://www.youtube.com/watch?v=p7REAvk0iJQ

 

1945, 세계 2차대전이 일제의 패망과 함께 종식되었다. 당대 이루어진 카메라 기술의 발전은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우리에게 보여준다. 여러 카메라가 당시 일제의 잔혹함과 그 끝을 담아냈고 이 모습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회자된다. 위의 동영상은 일제가 패망하고 미군의 함대에 올라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모습이었다. 일본 대표로 서명하던 인물은 다리를 심하게 절뚝거리며 테이블로 걸어간다. 그는 시게미쓰 마모루일본의 외무대신이었다. 2020년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에 공유하기도 했던 이 동영상에 담긴 그의 모습은 윤봉길 의사의 4.29 상하의 의거의 성공과 의의를 단번에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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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항복문서]

 

 

-      한국인의 한이 폭발하다. -

 

1932, 비 오는 어느 날 상하이 훙커우 공원, 3만 명의 사람들 사이 울려 퍼지는 기미가요. 그 선율을 깨부수는 한 맺힌 폭발음.

 

1932 4 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는 한인애국단의 젊은 청년 매헌 윤봉길 의사의 거사가 이루어졌다. 주권를 강제로 찬탈당한 한민족의 한이 폭발하는 순간이었다당시 신단 위에 올라왔던 7명의 인물들은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이들은 단순한 병사들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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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거 직전 식단]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다음해인 32 1 28일에 상하이사변을 일으켜 중국 본토의 침략을 본격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이 건립되며 전운은 더욱 커지고 있었다. 이 속에서 중국 침공의 성공을 축하하는 전승 기념 축전이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개최되었다.

 

이 행사에는 군인과 구경꾼을 포함해 3만명에 달하는 사람들과 일제의 주요 인사들이 참석하였다.  본격적인 행사의 시작 전 상해파견군 시라카와 요시노리 육군대장, 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육군 중장, 3함대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 해군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 마모루, 상해 총영사 무라이 구라마쓰, 상해 거류민 단장 가와바라 사다쓰구, 상해거류민단 서기장 도모노 모리가 식단이라고 부르는 사령대에 올라 일()자형으로 도열하여 연설을 하였다.

일제의 거물들이 모인 것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한인애국단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당시 일본의 문화정치가 극을 부리면서 국내의 독립운동이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국외에서도 독립군의 활동이 주춤하던 시기였기에 한중공동 항쟁이 필요했다. 또한, 사변을 일으킨 일제 침략군의 수뇌를 공격하여 민족의식과 독립운동에 대한 열의를 고취하고 국제 여론에 한국의 의지를 알리기 위하여 거사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봉창 의사로 달아오른 한인애국단의 열정 속 김구의 주도로 시작된 이 계획은 독립운동에 투철한 의지가 있던 24살 청년의 의지와 만나 상하이 의거라는 커다란 폭탄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그는 앞선 이봉창 의사의 의거가 폭탄 불발로 인해 절반만 성공한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더욱 철저한 준비를 하였다. 의거 3일 전 태극기 앞에서 의거 실행을 선서하고, 신상 조사와 훙커우 공원에 가서 현장 조사를 하고, 폭탄 투척 연습을 하였다. 또한, 거사에 착용할 옷과 시계를 사고, 유서와 유시를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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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앞 매헌 윤봉길 의사(), 김구와 교환한 회중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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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거 당시 소지한 폭탄의 구조]

 

그는 거사 당일인 297시 비가 올 것만 같은 흐린 하늘 아래 거사에 사용할 물통형 폭탄과 도시락 폭탄을 들고 행사장으로 향하는 차량을 탔다. 그는 새로 산 시계를 인사하러 나온 김구의 오래된 시계와 바꾸고 굳은 의지를 다졌다.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라는 말과 함께 차는 출발했다.

본격적으로 식이 시작되고 2부의 열병식과 3부의 본격적인 축하식에서 기미가요가 울려 퍼졌다. 2절의 마지막 소절을 부를 때 윤봉길 의사는 앞으로 달려나가 식단을 향해 물통형의 폭탄을 내던졌다.

 

이들의 피해는 상상 이상이었다. 상하이 침략의 원흉인 육군대장 시라카와는 전신에 24개의 탄편을 맞아 사망하였고, 해군중장 노무라는 실명, 육군중장 우에다는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그리고, 시게미쓰는 다리가 크게 다쳐 평생 절뚝거려야 하는 신세를 지게 되었다. 상해사변의 민간인 학살 가와바타는 병원으로 이송되어 다음날 사망하였고 그 외 인물도 크게 다쳤다. 식단에 오른 7명의 인물 모두가 생명에 지장이 갈 수 있는 큰 피해를 입은 것이었다.

이후 윤봉길 의사는 즉시 체포되었다. 그는 상하이파견군 헌병대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오사카를 거쳐 가나자와로 같은 해 12월 순국하여 육군묘지 관리사무소 앞 길바닥에 평장으로 매장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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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거 직후 모습(), 일본 기타쿠니 신문 의거 보도]

 

그의 의거는 일제의 군대에 큰 혼란을 가져왔을 뿐이 아니었다. 한인애국단이 의도한대로 항일전쟁의 의지가 중국과 한국에서 모두 불타올랐기 때문이다. 

 

 

 

-      장제스의 의지를 불태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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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국민당의 장제스]

 

특히 당시 중국국민당의 장제스와 대한민국임시정부 간의 다리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장제스가 의거를 듣고 중국의 100만 대병이 이루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청년이 이루어 냈다고 감복하였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지만 이는 사실 출전을 알 수는 없는 정보이다. 특히 당시 정황상 일본과의 정전 협정을 앞에 두고 있었기에 직접적인 발언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일기에 이러한 의거에 대하여 서술하였으며, ‘나라의 원수에 대한 원한의 결과로 침략의 당사자들이 깨달은 바가 있을 것이라는 글을 썼기에 의거를 인지하고 충분히 감복하고 칭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윤 의사의 의거가 일제의 확전을 일시적으로 막고, 정전협정의 추진에 역할을 큰 역할을 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 이를 계기로 장제스는 자신의 국가가 아니라 외부에까지 눈을 돌리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한인애국단은 목표를 이룰 수 있었다.

 

이후, 장제스는 김구와의 만나 임시정부의 지원을 약속하였다.  김구의 백범일지에는

 

 임시정부 청사 임대료도 못 내고 중국인 고용원 월급을 못 주어 소송까지 당하고 임정 요인들은 먹을 것이 없어 중국인들의 쓰레기통을 뒤지어 끼니를 해결한 적도 있다

 

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와 같이 어려운 상황에 놓였던 임시정부를 장제스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로 전폭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하여 임시정부를 회생시켰다. 장제스는 임시정부의 모든 운영비 등을 지원했고, 1932 10월경 김구를 만나 1933 5월 낙양군관학교에 한인반을 설치할 것을 약속하였다. 또한 1940 9월의 광복군 창설도 지원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와의 잦은 만남을 가지던 국민당 정부는 결국 한국의 독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약속하다. -

 

태평양 전쟁이 발생하고 일본의 패망의 색채를 보이자, 각국은 전후처리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그 속에서 대두된 것이 한국에 대한 국제공동관리. 이는 한국이 자치능력이 부족하므로 교육을 통한 준비기를 거쳐 독립이 달성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1943년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영국의 외상 이든을 만나 한국을 국제신탁통치 것을 제의하였고, 이든도 이에 찬성하였다. 이러한 사항이 보도되면서 자주적인 국력을 토대로 완전한 독립을 원했던 임시정부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는 1919년 윌슨이 발표한 민족자결의 원칙에 위배되며 한국은 충분한 자치능력이 있으며, 국제평화를 위해서는 일제의 패망 후 즉시 독립해야한다고 주장을 하며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따라 중화민국과 긴밀히 만나며 한중문화협회 주도 아래 반대운동이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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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카이로 회담()]

 

이 와중 중국과 미국의 회담 교섭이 실시되면서 1943 11월 영국의 처칠, 미국의 루스벨트, 중화민국의 장제스가 이집트의 카이로에 모여 회담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사전준비를 했는데 한국의 독립은 주요의제로 떠올랐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장제스에게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고 관철시켜 줄 것을 요청하고 장제스도 이를 약속하였다.

이에 따라 회담에서 장제스를 필두로 한 중화민국은

 

① 일본이 차지한 중국의 영토는 중국에 귀환하도록 한다.

② 태평양 상에서 일본이 강점한 섬들은 영구히 박탈한다.

③ 일본이 패망한 후 조선으로 하여금 자유 독립을 획득하도록 한다

 

위의 사항을 주요내용으로 제안하였다. 하지만 인도를 비롯한 자신들의 식민지에도 영향이 갈 것을 두려워한 영국 측의 반발로 인해 수정이 더해져 결국 최종적인 사항에서 특별조항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결정하고 12 1일 소련 스탈린의 지지를 확인하고 공표되었다.

 

<특별조항> 한국의 미래에 대하여 언급하고 독립을 보장하는 내용을 국제적으로 합의하였다

현재 한국민이 노예상태 아래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적절한 절차에 따라 한국에 자유와 독립을 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독립 이후 1946, 대한민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당해 2월 국문판으로 발간된 김구의 『도왜실기(한인애국단 활동전기)』 서문에서

 

 한국해방의 단서가 된 카이로회담에서 장제스 주석이 솔선해서 한국의 자유 독립을 주창하여 연합국의 동의를 얻었다는 사실 역시 그의 원인이 윤봉길의 장거에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라고 강조하였다.

 

윤봉길 의사의 4.29 의거는 대한민국 역사에 아주 큰 한 획을 그은 것이다.

 


-      4.29 의거와 대한민국 -

 

그의 거사가 이뤄지고 13년 후인 1945 9 2일 일본의 전권대사인 시게미쓰가 절뚝거리며 미국의 미주리함에 올라와 테이블 앞으로 다가왔다. 굳은 표정으로 수많은 미국의 병사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일제의 항복문서에 서명을 하게 된다. 패망국의 대신 다운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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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문서 서명을 위해 미주리함에 오른 일본 정부 대표단 일행]

 

그의 암울한 모습은 우리에게는 하나의 빛이었다. 항복문서에 서명하던 시게미쓰는 분명히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 나라 잃은 슬픔에 흐르는 한국인의 눈물처럼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 속에 굉음과 함께 터지던 우리의 울분을. 윤봉길 의사의 시계는 멈추었지만 대한민국의 시계는 다시 흐르기 시작하던 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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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윤병석. (2008).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와 독립운동. 매헌 윤봉길의사 탄신 100주년기념 학술심포지엄, 0(0), 11-40.

이성섭. (2022). 상하이 의거와 한국독립 - 매헌윤봉길의사 상해의거의 영향과 업적 -. 교원직무연수, 2022(0), 122-154.

김학준, 2022, 매헌 윤봉길 의사 평전

 

사진출처

매헌윤봉길기념관, http://yunbonggil.or.kr/_memorial_hall/

독립기념관, https://i815.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