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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 정보

망국의 설움 속에서 꽃피운 의열 청년 윤봉길의 삶

매헌의 생애

매헌 윤봉길의사의 출생과 성장
(동생 고 윤남의 선생이 밝히는 형님 이야기)

핏빛 노을 녘 대지의 맏아들

기울대로 기운 한말의 풍운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마침내 나라마저 무너져 내려 앉으려는 핏빛 노을 녘이었다. 대한제국의 잔명이 경각에 달해, 이른바 을사조약을 빌미로 설치한 일제의 통감부가 한반도 강점 준비의 그물을 쳐 나가기에 혈안이 되어있던 숨 가쁜 위기에 처한 때다.

날로 어두컴컴해지는 우리 한민족의 역사 박명기를 당하여 한 출기 빛이 이름 없는 농가에서 쏟아져 나왔다. 지금 으로부터 90여 년 전인 1908년 초 여름 초저녁 무렵이었다. 이해 6월21일 오후 8시경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 형님은 그 생애의 막을 우렁차게 울렸다. 겉으로는 이를 데 없이 한가롭고 평화로워 보이나, 일본 제국주의 먹구름이 어김없이 몰려오고 있는 [산자수명]山紫水明)한 두메산골, 곧 누구나 부러워하는 청풍명월(淸風明月)의 수려한 예향(禮鄕), 충효(忠孝) 충청도 예산 땅 한 촌락에서의 일이었다.

충남 예산군에서도 덕산면 시량리, 일명 '목발이'라고 하는 마을의 한미한 농가에서 듬직한 사내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목발이 마을에서도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의 검은 발길이 미치지 못할 목계천 건너 섬속의 섬, '도중도(島中島)'의 한가운데서 자리한 오늘의 광현당(光顯堂)에서 갓 20세의 어머니 김씨(慶州金氏) 새댁이 첫 옥동자를 분만하자 "대장감이로구나!" 하며 우리 할머니가 제일 먼저 반겼다. 더욱이 할머니로서 큰 자부가 첫아들을 순산하게 되자 두 장손을 거느리는 기쁨을 감추지 못 하였다. 동네 사람들이 다 부러워했다.

덕산 '복발이 마을에서는 큰댁과 우리 집만이 5형제씩 두게 되어. 마침 앞산인 수암산(秀岩山) '5형제 바위'가 있으므로 수암산 5형제 바위의 정기를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에 뒷산 가야산(伽倻山) 줄기에 장군봉(將軍峰)도 있어서 장군감이 또 태어났다고 반겨 마지않았다. 아무튼 딸은 하나도 많다고 꺼려하던 그 시절 농촌에서 사내아이 둘이 연년으로 태어난 데다가 형님은 갓난아이 때부터 대장감이라 해서 집안의 기쁨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한 발이 넘는 용 같은 커다란 구렁이가 입으로 들어오는 놀라운 꿈을 꾸었다. 태몽으로는 비범한 꿈이었다.

구렁이 꿈을 태몽으로 하여 태어난 형님의 울음소리부터가 너무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집안에서 젖먹이의 기상은 나날이 우림하여 부모님은 첫 아들을 무척 대견스럽게 여겼고, 앞날에 대한 기대 또한 남 달랐다. 이렇게 열 여덟 된 아버지(윤황: 尹煌)와 두 살 위인 어머니(김원상: 金元祥) 사이에서 태어난 형님의 자(字)는 용기(勇起)요, 본명은 우의(禹儀)이고 봉길(奉吉)은 별명이다. 서당을 마칠 즈음 스승인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 선생으로부터 매헌(梅軒)이라는 아호를 받았다. 후일 망명지 중국 상하이에서 대의거에 성공하고 투옥되었을 적에 옥중의 가명으로 희의(熙儀)를 쓴 적이 있다.

그 무렵 한반도 안팎의 정세는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져 폭풍우가 우리나라 전역을 휩쓸 듯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미 3년 전 을사5조약의 강제 체결로 실질적인 국권은 일제에 넘어가 외교권 박탈과 군대 해산이 급진전 되었다. 의분에 사무쳐 자결한 열사들의 피가 통한의 역사를 얼룩지게 했다. 한반도 강점을 노리는 왜적들의 탄압과 횡포가 가중 될 수록 경향 각처에서 의병들의 피어린 항쟁이 더욱 가열되어 갔다. 덕산에서도 의병대장 이근주(李根周)는 최후까지 구국전을 벌이다가 나라가 망하자 자결 순국한 것이다. 이러한 한말 풍운의 급박한 정세 속에서도 역사의 부름을 받은 봉길 형님만은 농가의 맏아들로서 탐스럽게 자라고 있었다. 대지의 마음이 뭉쳐진 흙에 뒹굴며 자라는 형님은 대자연의 혜택 속에서 농가의 장손으로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무럭무럭 자랐다.

어둠 속에 서린 어린 정기

우리 집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고려 중엽 문무 겸비의 명장으로 여진 정벌의 빛나는 전공을 세운 문숙공(文肅公) 윤관(尹瓘) 행영대원수(行營大元帥)의 후예로, 파평 윤씨 31세손(윤관 대원수로부터 27세손)인 형님은 어려서부터 체력이 출중한 데다 사리와 분별이 영특하였고, 누구 못지않게 용맹스럽게 자라며 철이 들어갔다.

우리 가문은 삼한 갑족에 꼽히는 명문이나, 근세에 들어 기복이 심한 편이었다.
증조 재(宰) 어른 때 예산 덕산에 정착하여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자 거친 산판을 일궈 나가며 들녘을 가꾸어 기름진 농토를 마련하기에 진력하였다. 더욱이 우직하고 순박한 할아버지(진영:振榮)께서는 부지런해서 땅에 묻혀 살기 얼마 안 되어 가세가 활짝 펼 수 있었다. 학문을 닦으며 선비 노릇이나 할 겨를인들 있을 리 없었다. 밤낮 없이 안정된 생활의 기반을 개척한 조부는 천성부터 근면 성실한 농부의 전형이었다. 누구나 오고가는 정을 나누기 보다 밤낮으로 땅과 피땀으로 대화하는 농사꾼이었다.

평생 땅만 파는 할아버지는 마을에서 '윤 두더지'로 통했고, 억척스런 성미와 철저한 근면 성실에 하늘도 감동했던지 마침내 벼 백 여석을 거둬들이는 부농을 이루었다. 흙에서 흙으로, 태어나 생애를 마치기까지 오로지 흙의 주인일 뿐 이었다. '목발이' 마을 목계천을 끼고 자리 잡은 '내 건너'에 왕국을 꾸민 우리 할아버지는 이처럼 당찬 농민의 본 보기였다. 그래서 우리 집 택호가 '내 건너'로 통하기도 했다.

백석이나 되는 부농이었지만 봉사손(奉祀孫)인 큰댁에 대부분의 토지가 상속되어 둘째인 우리 아버지 몫으로는 한 섬지기 남짓의 논과 2천평의 밭, 1만5천평의 산을 상속받았다. 그런대로 시량리 일대에서는 우리 집이 세 번째로 땅이 많은 편이었다. 그렇게 예산 일대 농촌 전반의 생활실태는 어렵기만 하였던 것이다.

형님이 척박한 산골, 한미한 시골을 배움터로 삼아 심신을 연마하는 한편 농촌계몽 활동을 전개하면서 민족사는 물론 세계사 앞에 큰 서광이 된 배경이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먼저 대자연의 혜택을 입을 수 있었고, 다음으로는 농촌사회의 참경을 지켜보면서 스스로 시련을 극복해 나가는 슬기와 용기를 익혀 체질화해 나갈 수 있었다.

차령산맥 호서(湖西)의 해안을 따라 보령 성주까지 이어져 나가는 도중에 광천 오서산에서 그 한가닥의 산맥이 북으로 거스르면서 홍성 월산과 용봉산을 거쳐 덕숭산에 이른다. 수덕사 뒷산인 덕숭산에서 비롯하여 원효봉·가야산 석문봉으로 서산·홍성·예산·당진 네 군의 경계를 이루는 장엄한 분수령이 가야산이다. 예산·서산·당진의 광야를 한 눈에 굽어보며 서해와 아산만으로 꼬리를 감추는 가야산 줄기는 그 주봉이 서쪽의 해미 안면도 바다와 동쪽으로 예산 평야에서 곧바로 치솟아 그 산세의 웅장함과 기암절벽, 그리고 골짜기마다 청류(淸流)를 자랑한다. 덕산에서는 가야산 주봉과 어깨를 겨루다시피 하고 있는 뒷산 원효봉이 위품을 지닌 모습으로 눈에 들어온다.

윤의사의 소년 시절부터 오르내린 원효봉의 저녁노을은 선경이 아닐 수 없었다. 저 신라시대의 원효대사(元曉大師)의 발길이 멎었다 하여 산기슭에 원효암(元曉庵)이라는 절이 있었다 하며, 지금도 절터에 약수터가 남아 있다. 원효봉이라는 이름도 물론 원효대사의 발자취에서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효봉은 도처에 금맥(金脈)이 있어서 조선 왕조 시절부터 채굴되어 왔다. 금을 캐다가 분통이 터질 지경이면 노다지가 나오기 마련이어서 '분통광'의 산지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예산 일대는 한때 금맥의 산지일 뿐만 아니라, 근세와 현대에 이르도록 인맥(人脈)의 보금자리이기도 하여, 호서 제일의 인물 산지로 알려졌다. 성삼문 등 조선조 충신은 두고라도 근세에 들어 윤의사 외에도 의병장 김복한과 백야 김좌진 장군, 만해 한용운, 천도교주 박인호 등의 충의열사가 잇따라 나왔다. 돌이켜 보면 조부 '윤 두더지'로부터 스스로 이룩하여 평생을 두고 혼자서 맨땅에 들불을 지펴 이룩한 결정체인 비옥한 대지가 아니었던가.

증조께서 새 터전을 찾은 칼럼부스라면, 조부님은 우리 집안의 광개토왕 격이었다. 척지공신 도원수 문숙공의 혈맥이 그대로 생동하는 집안의 혈통이었다고나 할까. 이러한 뜻은 선백 윤의사에 그대로 이어져온 줄 안다.

호서의 명산과 명인의 산지 그 인맥 가운데 영봉자락인 가야산과 그 이웃에 우뚝 솟은 원효봉 및 이에 마주하는 덕숭산이 어울러 빚어낸 웅건하면서도 수려한 기상이 어려서부터 넘쳤다. 유순한 듯하나 오를수록 산세가 험한 절경인 원효봉은 어린날의 형님에게 드센 꿈을 안겨 주었다. 억새풀 우거진 산기슭을 헤매며 예당벌의 트인 가슴을 굽어보는 듯 명상에 잠긴 초목들의 '관병식'에 묵묵한 표정을 짓다가 정상에 올라 가야산 너머로 들어오는 황해를 바라보며 높을수록 멀리 보는 예지에 가슴 뿌듯하면서도 고승 원효대사의 발자취가 남겨진 원효암터를 거닐게 되면, 보다 웅대하고 심오한 세계를 마음에 새길 수 있었다.

겉보기에 평범한 농가에서 자라면서도 비범한 기상이 감도는 매헌 윤의사의 시발점이었다. 산천초목도 서광어린 정기를 어린 심신에 불어넣어 어두움으로 치달리는 역사에 새 불씨를 심어 일으키도록 해 주었는가 보다.

연보(만나이)

1908년 출생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78번지 광현당에서 출생
1911년 3세
3월 광현당에서 저한당(시량리 139번지)으로 이사
1913년 5세
큰아버지 윤경(尹坰)에게 한문 수학
1918년 10세
덕산공립 보통학교입학
1919년 11세
3.1 독립운동에 자극받아 식민지 교육을 배격하며 자퇴
1920년 12세
동아일보, 개벽 등을 통해 신문물과 신사상 수용
최병대 문하에서 한학 수학
1921년 13세
서당 오치서숙에서 유학자 매곡 성주록 선생의 가르침을 받음
1922년 14세
성주 배씨 용순 여사와 결혼
1923년 15세
오치서숙 중추절 시회에서 장원
『한시집』, 『명추』, 『임추』, 『옥타』 등 시문집 남김
1926년 18세
오치서숙 졸업, 스승에게 '매헌'이라는 아호를 받음
농촌계몽 및 부흥운동 시작
야학 설립
1927년 19세
「농민독본」(3권) 저술 - 야학 교재용
1928년 20세
부흥원 설립
시조사 기자 이흑룡과 첫 만남, 항일무장투쟁론 수용 시작
독서회 조직, 월례강연회 개최
수암체육회 및 구매조합 결성
1929년 21세
『기사년일기』 집필 시작
야학 아동 학예회 개최, 「토끼와 여우」 공연
월진회 조직
위친계 조직
1930년 22세
3월 6일 「장부출가생불환」이라는 글 남기고 중국망명길 진출
4월 30일 만주 안동을 거쳐 중국 청도에 도착
일인 경영 세탁점에 취직
1931년 23세
5월 8일 청도에서 배편으로 상하이 이동
거류민단장 이유필, 안공근 만나 거취 의논
6월 박진이 경영하는 모자 공장 '미리공사' 직공으로 취직
직공들 간 친목회인 한인공우회 조직하여 야학 및 노동운동 실천
1932년 24세
3월 공동조계 안에 야채상 개업
4월 1일 김구선생을 만나 독립운동에 몸을 바칠 뜻을 전함
4월 20일 「상하이일일신문」에 보도된 일왕생일 및 상하이사변 승전 축하행사 안내문을 보고 김구선생을 만나 의거를 계획. 김구선생은 폭탄을 준비하고 윤의사는 사전 답사 등 의거 준비
4월 26일 안공근의 집에서 「한인애국단 선서식」 거행. 선서문 작성
4월 27일 3컷의 기념촬영. 홍커우공원 답사 후 김구선생에게 자필 이력서 및 4편의 유촉시를 작성하여 전달.
1932년 4월 27일 한인애국단 선서 기념촬영
4월 29일 김해산(김정묵)의 집에서 김구선생과 조찬 후 7시에 홍커우 공원으로 출발. 외빈들이 퇴장하고 난 후인 11시 40분(한국시간 12시40분)에 단상에 수통형 폭탄을 투척하여 시라카와 대장 이하 2명 사망, 5명에게 큰 부상을 입힘. 도시락 폭탄을 사용하기 전에 붙잡혀 상하이파견군 헌병대 제1분대로 압송.
5월 25일 상하이파견군 제9사단 군법회의(단심제)에서 사형선고
11월 18일 일제 대양환으로 일본 오사카로 호송되어 20일 오사카 육군 형무소에 수감
12월 18일 가나자와 제9사단 위수구금소로 이감
12월 19일 아침 7시 40분 가나자와 교외 육군 공병작업장에서 총살형으로 순국

매헌 윤봉길의사 가계도

매헌 윤봉길 의사 가계도
윤봉길의사 가족사진
가족사진
가족사진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로 떠나기 전 고향에서 남겨진 소중한 가족들과 함께 촬영한 역사적인 사진입니다.

두 아들 종과 담
두 아들 종과 담

윤봉길 의사의 두 아들인 윤종 선생과 윤담 선생의 어린 시절 모습을 담은 사진입니다.

윤의사 부인(배용순 여사)
윤의사 부인(배용순 여사)

윤봉길 의사의 숭고한 독립운동 길을 묵묵히 뒷바라지하며 평생 의리를 지킨 배용순 여사의 사진입니다.

백부 윤경 공 환갑잔치 기념촬영
백부 윤경 공 환갑잔치 기념촬영

윤봉길 의사의 백부이신 윤경 공의 환갑잔치 때 일가친척들이 함께 모여 남긴 단체 기념사진입니다.

부친 윤황 공과 모친 김원상 여사
부친 윤황 공과 모친 김원상 여사

윤봉길 의사를 훌륭한 민족의 영웅으로 길러내신 부친 윤황 공과 모친 김원상 여사의 소박하고 온화한 초상 사진입니다.

부인 배용순 여사
부인 배용순 여사

가정을 지키며 윤봉길 의사의 유지를 받들어 후손들을 길러내신 부인 배용순 여사의 귀한 단독 사진입니다.

윤봉길 의사 직계 유족 단체사진
윤봉길 의사 직계 유족 단체사진

좌로부터 세 번째 동생 윤남의, 며느리 김옥남 여사, 아들 윤종, 손녀 윤주경, 그리고 아래 좌로부터 손자 윤주웅, 윤주은, 윤주성, 윤주민 등이 함께 모여 찍은 사진입니다.

김구 선생 및 주요 인사들과의 유족 단체사진
김구 선생 및 주요 인사들과의 유족 단체사진

앞줄 왼쪽부터 조성환 선생, 김구 선생, 부친 윤황 공, 모친 김원상 여사, 부인 배용순 여사, 아들 윤종, 뒷줄 왼쪽부터 동생 윤남의, 동생 윤영의, 숙부 윤항 공, 조카 등이 함께 촬영한 귀중한 기록입니다.

의거 17주년 기념탑 제막 후 촬영
의거 17주년 기념탑 제막 후 촬영

1949년 4월 29일 의거 17주년에 기념탑을 제막한 후, 좌로부터 백범 김구 선생, 동네 아이, 윤의사 부친, 백부, 동생 윤남의 선생이 함께 남긴 기념사진입니다.

매헌 윤봉길의사 행적도

윤봉길 의사 국내외 행적도 지도
망명·순국·유해봉환 역사적 경로 타임라인
망명 경로
구국의 결단, 고향을 떠나 상하이로 향하다
1930년 3월 6일

충남 예산 출발: “장부출가생불환”의 장엄한 유필을 남기고 정든 고향 저한당을 출발했다.

1930년 3월 6일 ~ 8일

삽교, 서울, 선천 통과: 경비가 삼엄한 철도망을 비밀리에 경유하여 국경선으로 질주했다.

1930년 3월 말

신의주 → 압록강 도하 → 중국 단동 안착: 일제의 경비선을 뚫고 압록강을 건너 단동으로 진출했다.

1930년 4월 ~ 1931년 5월

중국 청도 체류: 거사 자금 조달 및 노동 계몽을 위해 일본인 세탁소에서 1년간 직공으로 근무했다.

1931년 5월 8일 ~ 1932년 11월 18일

중국 상하이 도청: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안착하여 백범 김구 선생과 훙커우공원 의거를 마침내 성공시켰다.

수감 및 호송 경로
적진 한가운데로의 호송, 그리고 장렬한 순국
1932년 11월 18일

상하이 출발 (왜선 다이요마루 호): 사형 선고 후 일제의 비밀 호송선에 의해 상하이에서 일본 본토로 수감 및 호송되었다.

1932년 11월 20일 ~ 12월 18일

일본 오사카 육군 형무소 수감: 한 달간 고독한 독방에서 일제의 삼엄한 감시 속에 수감되었다.

1932년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 공병 작업장: 영하의 추위 속 십자 형틀 앞에서 마지막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24세로 장렬히 순국했다.

유해 봉환 경로
쓰레기장에서 모셔온 의사의 고귀한 넋
1946년 3월 6일 ~ 8일

일본 가나자와 암장지 발굴: 광복 후 백범 김구 선생의 강력한 지시로 쓰레기 하치장에 묻혀있던 고귀한 유해를 눈물 속에 발굴 수습했다.

1946년 3월 9일 ~ 5월 초

도쿄 경유 고국 수송: 재일 한인 청년들의 삼엄한 호위 속에 도쿄를 경유하여 부산항으로 입국했다.

1946년 5월 15일

부산항 도착 및 전국민적 참배: 눈물로 마중하는 온 겨레의 예우를 받으며 고국 대지에 안착했다.

1946년 6월 15일

서울 효창공원 안장: 국민장으로 성대하게 엄수되어 삼의사(이봉창, 백정기 의사와 함께) 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