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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를 뒤흔든 한 청년의 외침, 자주독립의 기틀이 되다

상하이의거의 영향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의거는

• 1920년대 이후 침체기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능을 회복하게 하였다. 임시정부 내부 결속력이 높아지는 것은 물론 해외 동포들도 다시 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임시정부는 설립 초기처럼 독립운동의 구심점의 위치를 회복하게 되었다.

• 1930년대 식어가는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독립에 대한 희망이 점점 사라져 변절자가 많아지던 시기에 다시 한번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고 광복에 대한 자신감과 용기를 고취시켰다. 그 결과 침체되었던 국내외 독립운동에 새로운 활로가 열리는 전환점이 되었다.

• 상하이의거와 관련된 수많은 외신 기사들을 통해 세계에 조선의 존재를 알렸고, 조선과 일본의 관계 속에서 한민족이 여전히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알려져 전례 없는 외교적 효과를 달성하였다.

• 만보산 사건 등으로 갈등을 겪었던 한국과 중국 양국이 오해를 풀고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해 함께 싸우는 동반자로 서로를 재인식하게 되었다. 이는 중국과 공동으로 항일전선을 구축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 당시 국민당 정부 장제스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과 4억 국민이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라고 극찬하였다. 윤의사의 상하이의거를 계기로 장제스의 조선을 대하는 태도가 일변하였다. 1932년 5월 중앙육군군관학교에서 김구선생과 회담을 갖고 군사교육 지원 협약 등 임시정부 지원책을 논의하였다.

- 이후 뤄양 군관학교에 한인장교 훈련반을 설치하여 독립군들을 길러냈으며, 이후 한국광복군 창설도 지원하였다. 장제스 국민당 정부는 일제 패망까지 군정 양방면에서 임시정부 활동을 크게 후원하였다.

“장개석이 임정을 아무것도 아닌것으로 알고 동전 한푼 안도왔습니다. 윤의사 의거를 보고서야 장개석이 전적으로 돕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 소해 장건상,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중에서 -

- 윤의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광복운동의 결과,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서 장개석 총통이 연합국 수뇌들을 설득하여 카이로선언문 특별조항에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조항을 넣어 독립의 단초를 마련하였고, 이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으로 이어졌다.

“한국해방의 단서가 된 「카이로」 회담에서 장개석주석이 솔선해서 한국의 자주독립을 주창하여 연합국의 동의를 얻었다는 사실은 역시 그의 원인이 윤봉길의 장거에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우남 이승만. 「도왜실기」 서문 중에서 -
“중국은 우리 독립의 큰힘을 아끼지 아니하고 저돌하였으니, 장개석총통이 우리 독립을 선창할 때도 윤봉길 열사가 저때에 던지던 폭탄 소리가 귓가에 새로웠을 줄 안다.”
- 위당 정인보, 예산 추도비문 중